한국사상계에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 1890~1981) 열풍이 불고 있다. 다석은 스무살 때(1910년) 남강 이승훈 선생의 초빙으로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2년 간 학생들을 가르쳤고, 또한 1928년부터 YMCA에서 연경반 강의를 통하여 자신의 종교사상 구축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바탕으로 유불선을 비롯한 동양사상과 우리 고유의 한사상, 그리고 톨스토이와 간디의 무저항주의,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 사상 등을 통합적으로 아울렀던 한국이 낳은 위대한 사상가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종교다원주의를 다석 선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선구적으로 체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석 류영모는 박영호, 김흥호 등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연구되어 오다가 1990년대 이후부터 철학계와 신학계에서 조명을 받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세계 철학계에까지 그 존재가 알려져 있다. 나는 두 가지 관심 속에서 다석과 만나게 되었다. 하나는 한사상의 궤적을 살피는 과정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종교다원주의와 종교대화의 문제를 정리하는 그 교차점에서 순수 우리의 생각을 알차게 도출해낸 비중 있는 사상가로서의 다석의 면모를 발견하게 되었다. 특히 다석은 칸트에서 폴 틸리히, 그리고 최근 라이문도 파니카에 이르는 존재신학적 근거의 문제에 대하여 선구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점에서 나의 관심을 끌었다. 파니카의 우주신인론은 하이데거의 후기 존재론에서 신, 하늘, 땅, 인간의 조화적 협력 관계를 신학적 차원으로 확장한 것인데, 우리는 이와 같은 사유 내용의 선구적 형태를 다석의 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석은 한글의 기본 형태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한 사상가이다. 그는 아래아(ㆍ), 으(ㅡ), 이(ㅣ)를 신과 우주, 하늘과 땅, 시간과 장소의 관계를 나타내는 언어적 구조를 활용하여, 지금 여기에서 드러나는 구체적 실존을 ‘사이 존재’로서의 ‘가온찌기’(‘가온찍이’)로 규정하고, 그 수평적 관계의 무한 확장 가능성을 ‘으’(ㅡ)로 그 수직적 관계의 무한 확장 가능성을 ‘이’(ㅣ)로 해석하였다. 그는 인간을 몸, 마음, 얼로 구분하고 거기에 각각 ‘나’를 붙여서, ‘몸나’ ‘맘나’, ‘얼나’로 분류했는데, 몸나와 맘나를 합하여 일상적인 자기를 뜻하는 ‘제나’라고 불렀다. 제나는 아직 하느님과 만나지 못한, 그리고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비본래적인 자기이다. 그와 같은 일상적 자기 개념은 하느님과 만나면서, 하느님의 얼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본래적인 자기로 변화하게 된다. 거듭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다석의 인간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나에서 얼나로의 변화를 모색하는 일이다. 얼은 순수 우리말로서 정신을 뜻한다. 그리스도교적으로 바라보면 그것은 거룩하고 온전하고 신실하신 하느님의 영(靈), 즉 성령(聖靈)이다. 그런데 얼은 우리말에서 두 가지 모습의 사람을 나타내고 있다. ‘어른’과 ‘어린이’다. ‘어른’은 ‘얼’이 ‘으’(ㅡ)의 형태에 따라서 굳어진 것이고, ‘어린이’는 ‘이’(ㅣ)의 형태에 따라서 굳어진 것이다. 어른은 수평적, 사회적 관계를 중시하고 자기 존재의 권력적 확장을 꾀하는 존재 방식이다. 반대로 어린이는 수직적, 영성적 관계를 중시하고 자기 존재와 하느님(부모님)의 얼과의 일치를 중시하는 존재 방식이다. 성경이나 노자, 그리고 심지어는 니체조차도 어린이의 순진함과 천진난만함, 무위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다석은 제나에서 얼나, 어른에서 어린이, 비본래적 자기에서 본래적 자기로의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다석은 그와 같은 인격과 품성의 변화에서 그리스도론에 대한 대한 매우 특별한 접근을 시도한다. 정통 기독교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제2격의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을 지칭한다. 그러나 다석의 생각은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얼’을 가진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가 ‘하느님의 아들’인 것은 그가 ‘하느님의 얼’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느님의 얼은 사람이면 누구든지 구할 수 있고 그가 원하고 노력한다면 가질 수도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얼을 가진 사람은 모두가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 다석에 의하면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지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얼을 갖게 될 경우에 하느님과 일치에 도달할 수 있고, 그런 방식으로 하느님과 하나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다석은 예수와 성경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공자와 사서(四書), 노자와 도덕경, 붓다와 불경을 통해서도 그와 같은 하느님과의 일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와 ‘니르바나’와 ‘도(道)의 세계’는 별도로 특정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느님’이자 ‘하느님의 얼’인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니르바나도 하느님이고 하느님의 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석이 그리스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존경하고 경외한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증명된 사건, 즉 십자가 사건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를 통하여 제나(몸나와 맘나)에서 얼나로의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다석에게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단적으로 십자가 사건이다. 십자가 사건은 제나와 ‘어른’이 추구하는 수평적 이해관계의 무한확대와 얼나와 ‘어린이’가 추구하는 수직적 연대관계의 무한확장 사이의 충돌 사건으로서 그 필연적 귀결은 제나의 죽음이다. 십자가 사건은 제나의 죽음을 통하여 얼나의 세계가 도래하는 것을 뜻한다. 얼나의 세계라는 것은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이상세계로서 하느님의 얼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 즉 하늘나라, 하느님의 나라, 니르바나, 신선세계인 것이다. 다석은 십자가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얼나가 되는 것은 곧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뜻하며, 유교식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고 표현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친하다는 것은 하나라는 것, 곧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확정한 하느님과 아들의 동일본질을 뜻한다. 다만 다석은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본질에 그치지 않고 얼나로 탈바꿈한 모든 사람들과 하느님의 존재 역시 동일본질이라고 보는 것이다. 왜일까? 그가 하느님의 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인 것은 그가 하느님의 얼을 가졌기 때문인 것처럼, 얼나를 가진 내가 하느님의 아들인 것 역시 같은 이유에 근거하는 것이다. 다석의 다상은 정통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에 충격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깊은 의미를 성찰한다면 그것은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더 깊은 차원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결국에는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게 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서게 하는데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얼을 받아서 하느님과 일치하는 경우에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석의 사상을 맹목적으로 비판하기에 앞서 근본주의와 원리주의가 창궐하는 이 시대에 현자가 던지는 금언과 권면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석 류영모에 대한 책이 많이 있지만, 나는 이 책에서 그의 종교사상, 특히 신, 우주, 인간, 그리스도,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그의 원전인 ??다석일지??와 그것에 대한 김흥호, 박영호의 해설들, 그리고 다석에 대한 여러 문헌들을 참고하여 적어도 이 네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는 다양한 전거들을 직접 음미할 수 있도록 고려하였다. 마지막에는 다석과 파니카를 비교하는 글을 수록하였다. 아직은 거칠고 부족하기만 하다.
2012년 1월 15일 울산 고헌산 자락 선필마을에서 김 진
저자소개
저자/김진
독일 루어-대학(보쿰)에서 철학을 연구하였으며, 리챠드 쉐플러(Richard Schaeffler) 교수의 지도 아래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89년 이후 울산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Kants Postulatenlehre(Peterlang, Frankfurt 1988), <생활속의 철학>(1990), <칼 마르크스와 희랍철학>(1990, 1998), <철학의 현실문제들>(1994, 2004, 2007), <새로운 불교해석>(1996), Die Hoffnungsphilosophie im Maitreya-Buddhismus(Ulsan University Press 1997), <아펠과 철학의 변형>(1998), <칸트ㆍ순수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선험철학과 요청주의>(1999), <살고있는 순간의 어두움>(1999, 2001), <칸트와 불교>(2000, 2004), <칸트와 생태사상>, <퓌지스와 존재사유>(2003), <무아윤회 논쟁>, <라이프니츠, 헤겔, 쇼펜하우어와 불교>, <니체와 불교적 사유>, <하이데거와 불교>, <화이트헤드와 화엄형이상학>(2004), <동성애의 배려윤리적 고찰>, <칸트와 세계관의 철학>, <하느님의 길>, <최고선과 요청주의>(2005), <믿음 사랑 희망에 대하여>, <에른스트 블로흐와 희망의 원리>(2006), <사회정의와 문화정체성에 대하여>, <울산의 정치·문화에 대하여>, <줄기세포 조작에 대하여>, <한국 정치현실의 철학적 성찰>, <페미니즘 윤리학>, <처용설화의 해석학>(2007), <생각하는 삶>, <종교란 무엇인가>, <처용논쟁>(2008), <하느님의 나라와 부처님의 나라>,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철학자들>(2009)외 다수가 있다.
역서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자와 본질에 대하여>(서광사 1995)와 리챠드 쉐플러의 <역사철학>(철학과현실사 1997) 등이 있으며, 그밖에 <한의 학제적 연구>, <공학윤리>, Wahrheit und Erfahrung(Würzburg 2004) 등 다수의 공저와 논문들이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칸트 및 현대 독일철학이고, 종교철학, 형이상학, 역사철학, 환경철학의 주제들에 관심을 가져왔으며, 최근에는 신화학의 철학과 심리사상 분야에까지 관심을 넓히고 있다.